선사시대(2) 유적지(3) 고조선(2) 고대의 여러 국가(2) 삼국시대(13) 남북국(6) 고려 전기(17) 무신집권기(1) 고려 말기(2) 조선 전기(10) 조선 후기(20) 개화기(8) 대한제국기(5) 일제강점기(14) 현대 대한민국(9) 원간섭기(2) 불교(5) 유네스코 세계 유산(2) 고대 문화(6) 중세 문화(6) 조선 전기 문화(1) 조선 후기 문화(5) 근ㆍ현대 문화(6) 실학자(2) 토지제도(5) 미군정기(4) 역사서(6) 북한(1) 지역사(2) 사관(1) |
분류 | 남북국 | 난이도 | 상급 | 오답이유 | 3번, 단순 무지 |
해설 보기 |
밑줄 친 ‘그’는 최치원이다. ④ 서당(誓幢)은 원효의 어릴 적 이름이다. 고산사 서당화상비문은 제작자를 알 수 없는 비문으로 최치원이 지었다고 알려진 4산 비문에 속하지 않는다. 최치원의 4산 비명은 숭엄사 성주사 대낭혜화상 백월보광탑 비문,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령탑 비문, 초월산 대숭복사 비문, 희양상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비문이다.
오답분석 : ① <제왕연대력>은 최치원이 지었다고 알려진 역사서다. ② <삼국사기>에 전해져 내려오는 난랑비 서문은 신라의화랑도를 설명해주는 귀중한 자료로 화랑(풍류)도를 유ㆍ불ㆍ도의 3교를 포함하여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어 삼교 회통의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③ 최치원의 <법장화상전>은 중국 당나라의 화엄종 승려인 법장화상의 생애를 저술한 책이다. |
분류 | 중세 문화 | 난이도 | 상급 | 오답이유 | 1번, 지붕 형태까지는... |
해설 보기 |
㉠은 주심포, ㉡은 다포다. 맞배지붕은 지붕면이 양면으로 경사를 짓는 지붕 양식이며 우진각지붕은 건물의 네 면에 지붕면이있는 일자형 평면의 지붕 양식이다. 팔작지붕은 지붕 위에 까치박공이라는 조각을 달고 그 밑에 삼각형의 벽이 있는 지붕이다. ④ 성불사 응진전은 맞배지붕에 다포양식 건축물이다. 오답분석 : ① 부석사 무량수전은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② 봉정사 극락전은 맞배지붕에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다. ③ 수덕사대웅전은 주심포 양식의 건축물로, 백제 계통의 목조 건축 양식을 계승하였다. |
분류 | 중세 문화 | 난이도 | 상급 | 오답이유 | 1번, 지붕 형태까지는... |
해설 보기 |
㉠은 주심포, ㉡은 다포다. 맞배지붕은 지붕면이 양면으로 경사를 짓는 지붕 양식이며 우진각지붕은 건물의 네 면에 지붕면이있는 일자형 평면의 지붕 양식이다. 팔작지붕은 지붕 위에 까치박공이라는 조각을 달고 그 밑에 삼각형의 벽이 있는 지붕이다. ④ 성불사 응진전은 맞배지붕에 다포양식 건축물이다. 오답분석 : ① 부석사 무량수전은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② 봉정사 극락전은 맞배지붕에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다. ③ 수덕사대웅전은 주심포 양식의 건축물로, 백제 계통의 목조 건축 양식을 계승하였다. |
분류 | 고려 전기 | 난이도 | 상급 | 오답이유 | 단순 무지 |
해설 보기 |
주교사는 조선 후기 정조 때 설치한 관서로 한강의 배다리(주교) 가설 및 호남 호서지방의 조운 등에 관한 사무를 관할하였다. 오답분석 : ① 양계는 도와 달리 조세를 중앙으로 수송하지 않고현지에서 군수 등의 경비로 사용되었다. ② 고려에서는 조세를 각군현의 농민을 동원하여 조창까지 운반하였다. 이후 조창에서 개경까지의 운반은 조창이 있는 지역의 주민인 조창민이 담당하였다. 고려의 조창민은 조선의 신량역천 중 조졸(漕卒)과 유사했을것으로 추정된다. ④ 고려는 지방에서 거둔 조세를 11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모은 후 2월에서 4~5월까지 개경으로 운반하였다. |
분류 | 삼국시대 | 난이도 | 상급 | 오답이유 | 2번, 위덕왕 사료인 듯한 느낌이 있었는데 정작 위덕왕에 관한 선택지는 없길래 무령왕 고른 건데... 논란 중이고 결론은 아직 안 나서 무왕이 지은 걸로 보는구나. |
해설 보기 |
제시된 자료는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의 내용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즉위 전 무왕이 경주에서 서동요를 아이들에게 퍼뜨려 선화 공주와 결혼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백제 무왕의 왕비인 선화 공주의 발원으로 용화산 아래에 미륵사를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2009년 미륵사지 석탑 보수공사를 위해 석탑을 해체하는 중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는데 이 명문에서는 미륵사가 ‘좌평사택적덕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서 절을 창건하고기해년에 사리를 봉안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에 <삼국유사>의 서동요 설화의 허구성이 제기된 바 있다. 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 때 사비에 왕흥사를 낙성하였다고 전해진다. 왕흥사는 현재 부여 백마강 어귀에 터로 남아있다. 그러나 2007년 왕흥사지에서 발견된 사리함에 따르면 왕흥사가 백제 위덕왕 때 창건되었다고 알려져 왕흥사 또한 창건 시기에 대한 논란이 있다. 오답분석 : ② 무령왕에 대한 설명이다. ③ 근초고왕에 대한설명이다. ④ 성왕에 대한 설명이다. |
분류 | 고려 전기 | 난이도 | 하급 | 오답이유 | 2번, 순간 중추원과 도병마사를 혼동함 ㅠ_ㅠ |
해설 보기 |
시중~지문하성사는 재신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제시된 자료는 고려의 재신과 추밀이 모여 회의하는 재추회의에 대한설명이다. 고려에서는 재신과 추밀이 모여 도병마사에서 변경 지역의 군사 문제 등 대외 문제를, 식목도감에서 법의제정이나 각종 시행 규정 등 대내문제를 다루었다. ① 도병마사의 업무에 해당한다.오답분석 : ② 중추원에 대한 설명이다. ③ 고려의 삼사에대한 설명이다. ④ 어사대에 대한 설명이다. |
분류 | 현대 대한민국 | 난이도 | 상급 | 오답이유 | 단순 무지 |
해설 보기 |
제시문은 6.25 전쟁을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이 1951년 7월 10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진행한 휴전 회담의 내용이다. 당시 휴전 협정에서는 휴전선 문제와 포로송환 문제가 주된 쟁점이자 의제로 대두하였다. 휴전선 문제는 UN군이 제시한 양군의 ‘접촉선’으로 타결(1951. 10. 31)되었으나, 포로송환 문제의 해결이 쉽지 않았다. 공산군이 포로의 본국으로 무조건 송환해야 한다는 ‘본국 송환’ 안을 내놓은 반면, UN군은 포로에게 의사를 물어 송환해야 한다는 ‘자유의사 송환’ 안을 내놓아 양측이 크게 격돌하였다. 포로송환 협정이 서명되어 협상 타결이 가시화되자 이승만은 일방적으로 남한에 수용되어 있던 ‘반공포로’를 석방(1953. 6. 18)하였다. 이에 한때 회담은 다시 무산되는 듯하였으나 미국의 노력과 공산군의 동의로 결국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1953. 7. 27) ④ 휴전회담의 합의로 스위스·체코·스웨덴·폴란드로 구성된 중립국감시위원단이 설치되어 활동을 개시하였다. |
분류 | 현대 대한민국 | 난이도 | 중급 | 오답이유 | 단순 무지 |
해설 보기 |
밑줄 친 ‘개혁’은 1949년 6월 21일에 제정․공포된 농지개혁법이다. 이에 근거하여 추진된 농지개혁은 유상 매수․유상 분배를 원칙으로 하여, 1가구당 3정보 이내로 토지 소유를 제한하였고, 농지개혁법에 의하여 몰수 또는 국유로 된 농지와 소유권의 명의가 분명치 않은 농지는 정부에 귀속되었다. |
참고 자료 |
|
분류 | 고려 전기 | 난이도 | 중급 | 오답이유 | 2번, 단순 무지 |
해설 보기 |
진흥왕은 551년 신라로 귀화한 고구려 승려 혜랑을 승통(국통)으로 삼고 그 아래 주통과 군통을 두어 교단을 조직하였다. ③ 신라 말 화엄종은 후백제 견훤의 복전(福田)이 된 관혜(지리산 화엄사)와 고려 태조의 복전이 된 희랑(영주 부석사와 가야산 해인사)의 두 종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그 법문을 각각 남악(南岳)과 북악(北岳)이라 불렀다. 광종은 북악의 법통을 계승한 균여로 하여금 남악까지 통합하게 함으로써, 후삼국 이래 남악파와 북악파로 분열된 화엄종단을 통합하게 하였다. |
분류 | 남북국 | 난이도 | 상급 | 오답이유 | 1번, 단순 무지 |
해설 보기 |
민정문서는 일본 동대사 정창원에서 1933년 10월 <화엄경론질>의 파손 부분을 수리하던 중에 발견되었다. 민정문서에는 서원경 부근의 3개 촌락과 서원경의 직접 관할 아래 있던 1개 촌락에 대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이 문서에는 남녀 노동력의 자연적 증감과 제한적 인구 이동에 따른 사회적 증감이 기록되어 있으며, 인구의 연령별 6등급, 호구별 9등급 등 구체적인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또한 토지는 그 용도와 특성이 서술되어 있으나 증감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생산자원은 뽕나무, 호두나무, 잣나무 등 유실수와 소와 말의 수 및 증감이 언급되어 있다. ④ 민정문서에는 성별, 나이(연령대), 노비의 수는 기록되어 있으나, 주민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
참고 자료 |
민정문서 (촌락문서, 신라장적)
|
분류 | 대한제국기 | 난이도 | 중급 | 오답이유 | 선택지 공부 |
해설 보기 |
보루각은 1434년 세종에 의해 경복궁 경회루의 남쪽에 건립했던 전각으로,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를 설치한 곳이다. 간의대는 1434년에 만든 천문 관측대로 혼천의, 혼상, 간의, 규표를 설치하였다. ① 장충단은 대한 제국 시기인 1900년에 을미사변, 임오군란으로 순사한 충신․열사를 제사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 준 명나라 신종의 은혜를 기리기 위하여 숙종 시기에 세운 것으로는 창덕궁 후원에 세운 대보단과 화양계곡에 송시열의 유명으로 건립한 만동묘가 있다. ③ 원구단(환구단)은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천자의 제천의식을 위하여 세운 제단이다. ④ 선원전은 창덕궁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전각이다. 선원전의 어진들은 6.25 전쟁 시기 부산으로 옮겼으나, 1954년 대규모 화재시 대부분 소실되었다. |
분류 | 고려 전기 | 난이도 | 상급 | 오답이유 | 3번, 서경 천도는 실패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언을 서경 천도가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했다. |
해설 보기 |
최승로는 5대조 정적평에서 “광종의 8년 동안의 다스림은 가히 삼대[三代:하·은·주(夏·殷·周)]에 견줄 만하다.”고 격찬하였으나 광종 9년 쌍기를 등용하면서 정치가 어지러워졌다고 주장하고 통렬한 비판을 가하였다. 다음은 그의 광종에 대한 비판 내용이다. “경신년(960)부터 을해년(975)에 이르기까지 16년간은 간악한 자들이 앞을 다투며 진출하여 참소가 크게 일어나니 군자는 몸 둘 곳이 없고 소인은 제 뜻대로 되었다. 드디어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고 노예가 그 주인을 고소하기까지 하여 상하가 마음을 합치지 못하고 여러 신하들이 실망하여 옛 신하들과 이름난 장수들은 차례로 살육당하고 골육 친척들도 또한 모두 멸망당하였다.” |
분류 | 삼국시대 | 난이도 | 중급 | 오답이유 | 4번, 단순 무지 |
해설 보기 |
제시문은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을 알려주는 세 가지 기록(지기삼사)으로 <삼국유사>에 언급된 내용이다. ② 선덕여왕은 634년에 분황사와 분황사 모전석탑을 세웠으며 635년 영묘사를 창건하는 한편, 자장법사를 당에 보내어 불법을 수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후 자장의 건의에 따라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하였다. ① 진흥왕, ③ 진성여왕, ④ 진덕여왕 시기의 일이다. 진덕여왕은 당 고종에게 당의 태평성대를 칭송한 오언태평송을 지어 바쳤다. 이후 신라의 독자적 연호인 태화를 당의 연호인 영휘로 교체하면서 사대관계를 강화하였다. |
분류 | 유적지 | 난이도 | 상급 | 오답이유 | 2번, 단순 무지 |
해설 보기 |
서울 암사동에서 출토된 토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 토기는 구연부가 넓고 밑이 뾰족하여 달걀을 잘라 놓은 모양의 첨저형이다. 서해안 및 남해안 지역에서는 뾰족 밑을 기본으로 하는 첨저형 빗살무늬토기가 분포된 반면, 동해안 지역에서는 납작 밑을 기본으로 하는 평저형 빗살무늬토기가 분포되어 있다. 함경도 지역과 강원도 지역에서 출토된 빗살무늬 토기는 구연부가 넓으나 바닥이 좁 고 편평한 모양을 하고 있는 평저형의 특징을 보인다. 첨저형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된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서해안 지역에서 평안남도 온천군 궁산리,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서울특별시 암사동, 경기도 광주군 미사리, 경기도 부천군 시도(矢島) 패총 등이 있고, 남해안지역에서 부산광역시 동삼동 패총, 경상남도 김해군 수가리 패총 등이 있다. 평저형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된 유적으로는 동해안 지역에서는 함경북도 무산군 서포항(西浦項) 패총,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유적 등을 들 수 있다. |
분류 | 일제강점기 | 난이도 | 중급 | 오답이유 | 선택지 공부 |
해설 보기 |
자료는 1912년에 발표된 토지 조사령의 일부이다. 당시 조선의 농민들은 토지 소유권에 대한 법적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으며, 전통적으로 동중․문중의 공유적 성격을 가진 토지가 많아 이를 개인의 소유지로 신고하기에는 적당하지 못했다. 또한 짧은 기간과 복잡한 절차들 때문에 토지 신고가 제대로 되지 않아, 전 국토의 약 40%가 총독부 소유가 되었다.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은 만주나 연해주 등지로 이주하였으며, 해외로 이주하지 않은 농민들은 소작농이 되거나 임노동자가 되었다. 대상은 토지 소유권·지형·지목·토지의 가격이었다. 정해진 기간 안에 신고를 해야 하는 기한부 신고제로, 증거주의와 신고주의 원칙에 의해 이루어졌다. 토지 조사 사업은 농민의 경작 연고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① 임야는 1918년 제정된 임야 조사령에서 처리하였다. ③ 일제는 1914년 지세령을 공포하였는데, 이후 토지 조사 사업이 완료되자 1918년 이를 개정하여 지역별 지가와 그것의 1.3%를 지세로 하는 과세 표준을 명시하였다. 이에 따라 지세 수입은 1911년보다 1920년에는 2배 이상 증가하였다. ④ 토지가옥증명규칙과 시행세칙이 공포되었던 시기는 을사늑약 직후인 1906년이다. |
분류 | 일제강점기 | 난이도 | 상급 | 오답이유 | 4번, 단순 무지 |
해설 보기 |
제시된 선언문은 1923년에 신채호가 발표하였던 의열단의 강령인 ‘조선혁명선언’이다. 경성 부민관 폭탄 투척 사건은 1945년 7월 24일 대한애국청년당 소속의 조문기ㆍ류만수ㆍ강윤국이 친일파 박춘금 일당의 친일연설 도중 연단을 폭파했던 것으로 의열단과는 관계가 없다. 오답풀이 |
분류 | 개화기 | 난이도 | 상급 | 오답이유 | 1번, 4번과 관련하여 갑신정변의 자세한 내용을 몰랐다. |
해설 보기 |
자료의 사건은 갑신정변이다. 개화당은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면서 입지가 좁아졌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 도입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은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켜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문벌의 폐지, 인민 평등권의 확립,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등을 내걸어 차별적 신분 제도의 타파와 근대 사회의 건설을 위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려 하였다. 갑 신정변은 청의 무력 개입에 의해 좌절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정변을 지지하였던 일군이 청군에 패퇴하였으며, 일본 공사관이 불에 소실되었다. 오답풀이 ① 정동구락부는 한말 서울 정동에 있었던 구미인과 조선 개화파 중심의 사교 모임으로 1894년 사교와 친목 등 비정치적인 성격을 표방하며 설립되었다. 이 단체는 춘생문 사건과 관련이 있으며, 후일 독립협회 창건의 발판이 되었다. ② 갑신정변은 창덕궁을 중심으로 경우궁이 주 무대였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하였던 시기는 동학농민운동 시기 출병 후 6월 21일에 이르러서였다. 이후 갑오개혁이 추진되고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③ 차관 도입 실패는 갑신정변의 원인 중 하나에 해당한다. 갑신정변 실패 후 수신사 파견을 통한 차관 도입이 시도된 것은 아니다. |
분류 | 고려 전기 | 난이도 | 중급 | 오답이유 | 1번, 신량역천인이라 함은 곧 신분은 양인이란 뜻이 아닌가? |
해설 보기 |
① 고려 후기(무신집권기)에 명학소가 충순현으로 승격됨으로써 특수집단이 일반 군현으로 승격되기 시작하였다. ② 납속, 공명첩은 조선 후기의 상황이다.
납속(納粟) : 조선 시대에, 나라의 재정난 타개와 구호 사업 등을 위하여 곡물을 나라에 바치게 하고, 그 대가로 벼슬을 주거나 면역(免役) 또는 면천(免賤)해 주던 일. 속량(贖良) : 몸값을 받고 노비의 신분을 풀어 주어서 양민이 되게 하던 일. 속신4(贖身). |
분류 | 고려 전기 | 난이도 | 상급 | 오답이유 | 2번, 단순 무지 |
해설 보기 |
④ 서경은 길지이니 중시하라고 하였고, 서북인의 등용을 경계한 것은 조선 후기 홍경래의 난의 배경이 된 것이다. |
참고 자료 |
훈요십조
|
분류 | 일제강점기 | 난이도 | 상급 | 오답이유 | 2번, 단순 무지 |
해설 보기 |
① 상하이에서 조직되었으며, 진단(眞檀)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였다. ② 1914년에 경성고등보통학교 부설 교원양성소 학생들의 발의로 서울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였다. ③ 안창호가 로스엔젤레스(L.A.)에서 신민회의 후신으로 조직하였으며 국내지부로 수양동우회(1926)가 조직되었다. ④ 복벽주의를 표방하여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통해 순종황제를 옹립하여 하였다. |